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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여고를 다녔다. 교복 자율화로 교복은 입지 않았지만, 치마를 입는 게 규칙이었다. 집에서 버스로만 한 시간, 걷는 시간까지 합치면 족히 한 시간 반이 되는 거리였다. 당시엔 누구나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10, 자율학습이 끝나는 종소리가 나면 나는 가방을 싸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나와 버스를 탔다. 버스 안을 둘러보면 바로 옆집에 사는 내 단짝 친구도 숨을 헐떡이며 사람들 사이에 낑겨있었다. 나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던 친구도 내 눈과 마주치면 서로 미소를 보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버스에서 내려 가로등도 없는 길을 따라 20분은 가야 하는데, 다른 학생들도 있었고 혼자가 아니라 무섭진 않았다. 당시엔 인신매매에 관한 뉴스가 연일 흘러나왔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윤락업소로 끌려가 말도 못할 고초를 겪는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엄마는 언니와 나를 앉혀놓고 조심, 또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나는 무서워서 고개가 떨어질 정도로 끄덕끄덕했지만 정작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몰랐다. 엄마는 학교에서 밤늦게 집에 올 때 치마는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체육복 바지로 갈아입고 다녔다.

 

그날도 친구와 밤하늘의 별들을 감상하며 집으로 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늦은 시간이라 차가 다니지 않는 2차선 도로였는데, 검은 그림자는 굳이 차로를 건너 우리 편으로 휘청이며 다가왔다. 친구와 나는 본능적으로 갓길로 피했다. 검은 그림자는 술 냄새를 풍기며 내 팔을 붙잡았다. "왜 피해? 내가 더러워?" 이어 욕에 항상 콤보로 따라다니는 욕설이 날아왔다. 그날따라 길에는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친구는 내 옆에서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나도 속으론 벌벌 떨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아저씨가 이쪽으로 오시니까 저희가 피해드린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 남자는 말대꾸했다고 내 머리통을 때렸다. 그리고는 꺼지라고 하기에 친구와 나는 잽싸게 꺼지려던 찰라, 그가 마음을 바꿔 다시 우리를 불러 세웠다. ", 이리 와봐. 내가 재밌는 거 해줄게." 검은 그림자가 흘리는 비열한 미소에 친구와 나는 동시에 가장 가까운 집으로 달려가 불 꺼진 대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소리쳤다, "엄마!!! 나왔어. 문 열어 줘" 내 목덜미를 붙잡고 끌고 가려던 검은 그림자에 맞서 나는 대문 손잡이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이 손잡이를 놓치면 난 죽는다는 심정으로. 마당에 불이 켜지자 검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달아났다.

 

집에서 중년의 부부가 나오셨는데, 나는 무서움과 서러움이 폭발해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아주머니께서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주시는 동안 집주인 아저씨는 그림자가 사라진 쪽을 향해 큰 소리로 거친 말을 해주셨다. 곧이어 사색이 된 엄마가 나타났는데, 부들부들 떨고 있는 엄마 손에는 녹이 잔뜩 슨 연탄집게가 들려있었다. 엄마 뒤에는 큰 수술을 하고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병약한 언니와 10살 남동생이 따라왔다.

 

40대 초반이었던 엄마도 혼자서는 안전할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당시 아빠는 직장 때문에 다른 도시에 있었고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우리 집에는 이런 바람을 막아줄 남자가 없었다. 어딘가에 숨어서 기회만 엿보고 있을지도 모를 악당을 대비해 엄마는 온 집안 식구들을 총동원했다. 그리고 자신과 자식들을 지키기 위해 연탄집게를 든 것이다.

   

집에 무사히 돌아온 나는 갑자기 맥이 풀리면서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 이왕이면 식칼 같은 것을 들고 나와야지 연탄집게가 뭐야?" 엄마는 나를 꼭 껴안으면 얼마나 무서웠냐고 토닥이며 지은 죄도 없이 미안하다고 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나는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갔다. 혼자 남겨진 친구가 걱정돼 마음이 쓰였는데, 다행히 친구는 군대를 전역한 오빠가 날마다 데리러 나온다며 날 안심시켰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악몽을 꿨고, 나이 오십이 된 지금도 검은 그림자만 보면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 친구와 나는 지금까지 단짝으로 지내는데 우린 이 일에 관해 수도 없이 복기했다. 친구는 "그때 네가 발버둥 치고 있을 때 내가 가방으로 그 사람을 내려칠 걸 그랬어, 아니, 돌멩이를 들고 머리라도 때려버릴걸." 돌이켜보면 우린 둘이라 그럴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때 우린 어렸고 공포에 질려 아무런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성폭행 당한 69세 효정

   

영화 < 69>에는 69세인 효정(예수정 분)과 그의 동거인 동인(기주봉 분), 그리고 중호(김중호 분)가 나온다. 29세의 중호는 물리치료 보조사로 아무도 없는 치료실에서 치료받는 69세 효정을 성폭행했다. 그리고 신고 당하자 합의 하에 이뤄진 관계였다고 주장한다. 신고를 받은 경찰의 말은 더 가관이다. "친절이 지나쳤네." 성폭행을 앞에 두고 친절이 지나쳤다니! 한낱 노인네에게 젊고 잘생긴 남자가 기꺼이 성은을 베풀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신고했다는 의미인가? 영화에서 경찰들은 효정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를 조롱하고 모욕하고 급기야 치매로 몰아간다.

 

효정은 동인에게 짐이 되는 자신이 버거워 집을 나와 재택 간병인을 하는데, 동인이 찾아온다. 동인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 효정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기거하는 집에 웃풍은 없냐고 묻는데, 그 순간 내 심장이 찌릿함을 느꼈다. "밥 잘 먹어라", "건강 잘 챙기라"는 게 아닌 웃풍 걱정. 추운 겨울, 효정 방의 웃풍을 걱정하는 그 마음이 시리고 아프고 따뜻하게 다가왔다. 세상천지에 누구 한 사람만 내 안부를 걱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그 힘으로 버텨나갈 수 있다. 잠시 사건으로부터 피하고 싶었던 효정은 세상을 향해 정면승부를 던진다.

   

중호의 처가를 찾아간 효정은 모든 사실을 알리고 돌아가던 중 중호와 마주친다. 중호는 자신이 한 짓은 생각지도 않고 자기 인생을 끝장낼 거냐고 악다구니를 쓰며 효정을 위협한다. 이어 눈알을 부라리며 "내가 좋으라고 해줬잖아"라고 말하는 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얌전한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이 말은 중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고, 그날 그 검은 그림자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내 욕이 끝나기도 전에 효정의 입에서 "너 진짜 개새끼구나" 하는 대사가 튀어나왔다.

 

영화는 세상을 향한 효정의 한 걸음으로 끝이 났다. 한 걸음 나아갔다고 해피엔딩은 아니지만, 그 용기에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끝도 없이 고통스러웠을 세상의 수많은 효정들에게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기에 영화가 끝나고도 가슴이 먹먹해 일어나기 힘들었다.

 

도움을 청하는 효정에게 간호사는 "조심하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데 수술한 노인이 주사를 맞아 몽롱한 데다 저항할 수도 없는 상태에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더 조심해야 한단 말인가. 조심하기만 하면 벌어지지 않는 일인가. 그때 나는 무엇을 조심하지 않아서였을까. 체육복 바지를 입어야 했던 10대 소녀인 나에게, 연탄집게를 들어야 했던 43세 엄마에게도, 치료가 필요했던 69세인 효정에게도 세상은 안전하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https://brunch.co.kr/@julia2201/95   -by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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