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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0.01.11 11:47

2019, 지구 종말의 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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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로드] 감독: 존 힐코트 주연:비고 모텐슨·샤를리즈 테론

2019년, 지구 하늘에는 해가 없다. 지진이 건물을 삼켰고 화재가 숲을 태웠고 공포가 인간을  망쳤다. 사람이 사람을 먹고 허기가 광기를 부른다. 윤리는 일찌감치 잿더미에 파묻혀 먼지처럼 사라졌다. 터무니없이 작고 말할 수 없이 초라한 가치로 쪼그라들어 세상 밑바닥에 말라붙어버린 희망. 한 아버지(비고 모텐슨)가 아들에게 그걸 보여주겠다고 결심한다. 희망 말이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길 위에 선다.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해. 아니, 어쩌면 따뜻할지도 모르는 남쪽 나라를 향해. 그래서 또 어쩌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이 잿빛 세상을 비웃는 푸른 바다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하염없이 걸어간다. 하지만 세상에는 살인자가 날뛰고 조금만 틈을 보여도 약탈자가 공격한다. 가도 가도 길은 끝나지 않고 봐도 봐도 앞날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행군. 그 길고 힘든 여정을 먼저 소설이, 그리고 다시 영화가 따라간다.

원작의 깊이와 감흥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영화 <더 로드>는 2007년에 퓰리처상을 받은 소설 <로드>를 카메라에 담아낸 작품이다. ‘담았다’라는 표현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영화도 참 오랜만이다. 소설가가 종이 위에 활자로 눌러쓴 2019년 지구의 황량한 풍경을 스크린 위에 구체적 비주얼로 다시 ‘담는’ 데 열중하는 영화는, 원작 소설에 굳이 뭘 더 ‘담아’내려고 욕심내지 않았다. 소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 걷기만 해도 이미 충분히 우울한 결말에 도달하기 때문일 것이다. 먹을 게 없다고 사람 고기를 욕심내는 인간들 이야기보다 더 우울한 얘기는 흔치 않다.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나중에 읽었다. 참 잘 쓴 소설이기도 하거니와, 꽤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누구는 원작의 깊이와 감흥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고 손가락질하겠지만, 원래 영화는 소설의 깊이와 감흥을 온전히(!) 살려내기 힘든 매체다. 수백 쪽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올린 이야기의 공든 탑을, 겨우 두 시간 안팎의 영화로 재건축하는 일은 늘 밑지는 장사일 수밖에 없다.

<더 로드>는 비교적 수지가 맞는 장사를 했다. 망해가는 지구의 황폐한 풍경을 묘사하는 표현력이 특히 좋다. 작가가 문장으로 상상한 세상을 감독이 영상으로 살려낸 한 장면 한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이 잘 쓴 소설을 왜 굳이 영화로 다시 만들려고 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원작자 코맥 매카시가 책을 쓸 때 머릿속에 떠올린 세상도 아마 영화가 상상한 미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폐허가 된 도시를 묘사하는 데는 천운(?)도 따랐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미국 뉴올리언스의 쇼핑몰이 지구 멸망 후 쓸쓸한 풍경을 담는 요긴한 촬영 장소로 쓰였다. 우리가 이미 매일매일 지구의 작은 종말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다.

코맥 매카시는 2008년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 소설도 썼다. 매카시는 매번 어둠이 빛을 이기는 세상을 그린다. 간신히 어둠을 이겨낸 빛이라 할지라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너덜너덜해진 빛으로 그려내기 일쑤. 그가 보기에 인간의 희망은 진즉에 방전됐고, 세상의 악은 점점 더 힘이 세진다.

원작을 성실하게 각색한 작품답게 <더 로드>가 상상하는 미래도 끔찍한 악몽이다. 하지만 진짜 끔찍한 건 그런 악몽이 현실이 되는 데 굳이 2019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다는 불안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이미 영화 속 주인공처럼 추운 거리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이 넘쳐난다. 내 배를 채우기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는 악다구니 속에서 길이 곧 집이 되어버린 이웃들. 영화 보고 집에 가는 길에 신문지 하나로 삭풍을 막아내는 지하철역 노숙자를 보며 생각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달력은 이미 2019년이 아니냐고.

김세윤 (영화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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