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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죽은 시대, 산문의 시대,

더구나 문자언어에서 영상언어로 문화의 중심이동이 이루어진 시대에

영화 속에서 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창동 감독은 그의 다섯 번째 작품 [시]에서

서사가 범람하는 시대에 시의 정신에 대해 묻고 있다.


맑은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한 여학생의 시신을 보여주면서,

누가 이 여학생을 죽였는지,

그리고 우리는 그 주검의 공범인지 방관자인지 가해자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편협한 정치적 시선으로,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감독 이창동의 애절한 송가라고

이 영화의 의미를 미리 제한하지 말자.

그것은 시정신과 위배되는 일이다.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 근교의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미자(윤정희).

그녀는, 동사무소에서 지급하는 월 몇십 만원의 돈으로

힘겹게 생활을 영위하는 기초생활대상자이다.

하지만 남루한 삶을 드러내지 않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는 것을 좋아하며

가끔 엉뚱한 행동도 하고, 문학교실에 등록해 시를 배우는

60대 후반의 할머니이다.

중풍으로 반신불구가 된 전직 회장(김희라)을 보살피는 일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는 딸이 이혼한 뒤 부산에 내려가면서 맡긴 손자와 함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시창작 교실에서 시를 지도하는 김용탁(김용택) 시인은,

시란,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사물의 겉모습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사물의 진정한 내면을 관찰하는 데서

시가 시작한다는 말을 기억한 미자는,

지금까지 무심코 지나쳤던 주위의 사물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틈만 나면 사물을 관찰하고 작은 수첩에 열심히 메모도 한다.

시창작 교실이 끝나기 전까지 시 한 편을 창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등학생인 손자(이다윗)는 밤 늦게까지

친구들 6명과 몰려다닌다.

미자와 배드민턴을 치다가도 친구들이 연락을 하면

배드민턴채를 내팽개치고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달려간다.

어느날 낯선 남자가 미자를 찾아온다.

6명의 손자 친구들 중 한 명의 아버지였다.

그 남자(안내상)를 따라 모임에 가 보니 6명의 부모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강물에 투신해 죽은 여학생의 노트에

미자의 손자를 비롯한 6명의 남학생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죽기 몇 달 전부터 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죽은 여학생의 어머니가 학교에 이 사실을 알렸고

외부에 이 사건이 알려지기를 꺼려하는 학교 당국에서도

피해자 부모와 가해자 부모 사이의 원만한 합의를 종용하고 있었다.

결국 학생 부모들이 1인당 5백만원씩 3천만원의 합의금을 만들어 주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미자는 가난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5백만원을 만들 수는 없다.


[시]는 미자의 삶을 따라 우리 시대의 아픈 환부를 보여 준다.

가장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며 도덕적 불감증, 그리고 우리들의 이기심이다.

미자는 중풍에 걸린 노인의 알몸을 씻겨 주고, 손자에게 밥을 해 먹이면서도,

시를 쓰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은 맑은 시의 언어와는 거리가 있다.

중풍 노인은 비아그라를 먹고

남자 구실을 한 번만 하게 해 달라고 미자에게 애원한다.


손자가 성폭행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미자에게는 큰 충격이다.

미자는 성당에서 진행되는 여학생의 영혼미사에 참가해

몰래 여학생의 사진을 가져와 식탁 위에 놓는다.

더구나 병원에서는 미자가 알츠하이머,

즉 치매가 진행되고 있다고 통보한다.

합의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 미자는

죽은 여학생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시골길을 걷는다.

그 어머니를 만나서도 날씨 이야기이며 시골 풍경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뒤돌아서다가,

자신이 이곳을 방문한 진짜 목적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시]는

세상을 바라보는 때묻은 시선을 버리고

맑은 눈으로 사물의 새로운 면을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그 메시지 속에는

이 혼탁한 시대를 정직하게 바라보려는

감독의 애절함이 담겨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창동 감독은

투신 자살하기 위해 난간에 서 있는 여학생을 보여준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을 유추해낼 수 있다.

삶의 벼랑에 서 본 사람은 안다.

절벽 아래로 우리의 등을 떠미는 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시대의 불협화음에서 비롯되는

집단적 압력이라는 것을.

저 낮은 곳에서 소리내어 흐르는 거대한 강물은 알고  있다.


영화평론가 하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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